다이라노 기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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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1118년에 태어난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으로, 다이라 씨의 수장이자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에서 승리하며 무사 가문의 지위를 확립하고, 1167년에는 무사 출신 최초로 태정대신에 임명되어 정계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딸을 황족과 결혼시키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강화했지만, 그의 과도한 권력 장악과 헤이케 일족의 독주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겐페이 전쟁의 발발을 막지 못하고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다이라 씨는 멸망했다. 기요모리는 권력욕과 냉혹함, 그리고 개명적인 면모를 동시에 가진 인물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창작물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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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기요모리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다이라노 기요모리 (平清盛) |
로마자 표기 | Taira no Kiyomori |
별칭 | 헤이다이쇼고쿠(平大相国, 다이라 대 상국), 로쿠하라도노, 후쿠하라도노, 기요모리뉴도 |
계명 | 조카이(浄海) |
출생 | 겐에이 원년(1118년) |
사망 | 지쇼 5년 음력 2월 4일(1181년 3월 20일) |
사망 당시 나이 | 64세 |
국적 | 일본 |
직업 | 군사 지도자, 쿠교 |
묘소 | |
묘소 위치 | 노후쿠지, 고베시 切戸町, 로쿠하라미쓰지, 기오지, 히코시마 |
관위 | |
관위 | 종일위, 태정대신 |
주군 | |
주군 | 스토쿠 천황(도바인) 고노에 천황(도바인) 고시라카와 천황 니조 천황(고시라카와인) 로쿠조 천황(고시라카와인) 다카쿠라 천황(고시라카와인) 안토쿠 천황(고시라카와인, 다카쿠라인) |
가문 | |
씨족 | 이세 헤이시 고레히라 파 |
가족 | |
아버지 | 다이라노 다다모리 |
어머니 | 시라카와인뇨보(기온노뇨고의 여동생?) |
계모 | 이케노 젠니 |
형제 | 이에모리 쓰네모리 노리모리 요리모리 다다노리 그 외 |
배우자 | |
정실 | 다카시나노 모토아키의 딸 |
계실 | 다이라노 도키코 |
측실 | 도키와 고젠 이쓰쿠시마노 나이지 |
애첩 | 기오, 부쓰고젠 |
자녀 | |
자녀 | 시게모리 모토모리 무네모리 도모모리 시게히라 도모노리 기요후사 도쿠코 모리코 사다코 로노온카타 미코노히메기미 보몬 노부타카 아내 가잔인 가네마사의 아내 레이센 다카후사 아내 |
기타 |
2. 생애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1118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이라노 다다모리의 첫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궁중 시녀였다고 전해진다.[6]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시라카와 천황의 총애를 받은 기온노 뇨고(祇園女御)가 다다모리에게 하사되어 기요모리가 태어났다고 하지만, 다른 판본에서는 기요모리가 기온노 뇨고를 섬긴 중등 여방(中﨟女房)의 뱃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오미 고궁신사(胡宮神社) 문서에는 기요모리 생모를 기온노 뇨고의 여동생으로 하고, 기온노 뇨고가 기요모리를 양자로 삼았다고도 적혀 있다. 기요모리가 다다모리의 정실(正室)의 자식이 아님에도 적남(嫡男)이 된 배경에는, 후견인인 기온노 뇨고의 권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이지 4년(1129년), 12세에 종5위하(従五位下)·좌병위사(左兵衛佐)에 서임되었다. 후지와라노 무네타다는 이에 대해 경악했다.[11][12] 어릴 적 기요모리는 기온노 뇨고의 비호 아래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의 기요모리는 도바 천황의 총신 후지와라노 이에나리의 저택에 출입했다. 다카시나노 모토아키의 딸과의 사이에서 시게모리·모토모리가 태어났지만, 아내와는 사별한 것으로 추측된다.
호엔 3년(1137년), 기요모리는 히고노카미(肥後守)에 임명되었다. 규안 3년(1147년)에는 다이라노 도키코와의 사이에서 무네모리가 태어났다. 같은 해 6월 15일, 기온샤(祇園社)에서 휘하의 노토들과 신인(神人) 사이의 다툼으로 인해 부하들이 쏜 화살이 보전(宝殿)에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기온 투란 사건(祇園闘亂事件)).[42] 엔랴쿠지는 다다모리, 기요모리의 유형(流刑)을 요구했으나 도바 법황은 기요모리의 죄에 대한 처벌을 속동(贖銅) 30근이란 벌금형으로 그쳤다.
그 후, 기요모리를 대신해 이에모리가 히타치노스케(常陸介), 고바노카미(右馬頭)로 임명되어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규안 5년(1149년) 이에모리가 급서하면서 기요모리의 적통(嫡統)으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이후 기요모리는 아키노카미(安藝守)에 임명되어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어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이쓰쿠시마 신사를 숭앙하게 되었다. 닌페이 3년(1153년), 다다모리의 죽음으로 기요모리가 헤이시 일문의 당주가 되었다.
기요모리의 생애에 대한 주요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음력 | 서력 | 월일 (음력) | 내용 | 출전 |
---|---|---|---|---|
원영 원년 | 1118년 | 1월 18일 | 탄생 (세는 나이 1세) | |
다이지 4년 | 1129년 | 1월 6일 | 종오위하. 1월 24일, 좌병위좌. (12세) | 공경보임 |
다이지 6년 | 1131년 | 1월 5일 | 종오위상 (14세) | 공경보임 |
초승 4년 | 1135년 | 1월 5일 | 정오위하. 8월 21일, 종사위하. (18세) | 공경보임 |
보연 2년 | 1136년 | 4월 7일 | 중무대부 (19세) | 공경보임 |
보연 3년 | 1137년 | 1월 30일 | 후고쿠 수(守) 겸임 (20세) | 공경보임 |
보연 6년 | 1140년 | 11월 14일 | 종사위상 (23세) | 공경보임 |
구안 2년 | 1146년 | 2월 1일 | 정사위하. 2월 2일, 아키쿠 수 겸임. 후고쿠 수 임시 교체. (29세) | 공경보임 |
호겐 원년 | 1156년 | 7월 6일~11일 | 호겐의 난 (39세) | 공경보임 |
7월 11일 | 하리마쿠 수 | 공경보임 | ||
호겐 3년 | 1158년 | 8월 10일 | 대재대이 (41세) | 공경보임 |
헤이지 원년 | 1159년 | 12월 9일~26일 | 헤이지의 난 (42세) | |
에이랴쿠 원년 | 1160년 | 6월 20일 | 정삼위. 8월 11일, 참의. 대재대이 그대로. 9월 2일, 우에몬도쿠 겸임. 12월 30일, 대재대이 사임. (43세) | 공경보임 |
에이랴쿠 2년 | 1161년 | 1월 23일 | 검비위사별당 겸직. 오미곤슈 겸임. 9월 13일, 권중납언. 검비위사별당·우에몬도쿠 그대로. (44세) | 공경보임 |
오보 2년 | 1162년 | 1월 9일 | 검비위사별당·우에몬도쿠 양 관직 사임. 윤2월 9일, 검비위사별당·우에몬도쿠 겸직. 4월 7일, 황태후궁권대부 겸임. 8월 20일, 종이위. 9월, 검비위사별당·우에몬도쿠 양 관직 사임. (45세) | 공경보임 |
쵸칸 3년 | 1165년 | 1월 23일 | 병부경 겸임. 8월 17일, 권대납언. 병부경·황태후궁권대부 그대로. (48세) | 공경보임 |
에이만 2년 | 1166년 | 6월 6일 | 정이위. 10월 1일, 춘궁대부 겸임. 병부경·황태후궁권대부 양 관직 그만둠. 11월 11일, 내대신. (49세) | 공경보임 |
니안 2년 | 1167년 | 2월 11일 | 종일위 태정대신. 5월 17일, 태정대신 사임. (50세) | 공경보임 |
니안 3년 | 1168년 | 2월 11일 | 출가 (51세) | 공경보임 |
죠안 원년 | 1171년 | 덕자 입내 (54세) | ||
지쇼 원년 | 1177년 | 시카가야의 음모 (60세) | ||
지쇼 3년 | 1179년 | 지쇼 3년의 정변 (62세) | ||
지쇼 4년 | 1180년 | 4월 22일 | 안덕 천황 즉위 (63세) | |
4월 | 이닌왕이 평씨 토벌의 칙령을 발포하다 | 아즈마가가미 | ||
6월 10일 | 준삼궁 선하 | 햐쿠렌쇼 | ||
8월 17일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거병 | 아즈마가가미 | ||
요와 원년 | 1181년 | 윤2월 4일 | 훙거 (향년 64 / 만 63세로 사망) | 규요 |
2. 1. 헤이시(平氏)의 동량
겐에이 원년(1118년) 이세 헤이시의 두령이었던 다이라노 다다모리의 장남으로 이세 우부시나(産品, 미에현 쓰시 우부시나)에서 태어났다.[6][7] 생모는 알 수 없으나, 시라카와 법황을 섬긴 여방(女房)으로 다다모리의 아내가 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헤이케 이야기에는 시라카와 천황의 총애를 받은 기온노 뇨고(祇園女御)가 다다모리에게 하사되어 기요모리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엔케이본(延慶本)에서는 기요모리가 기온노 뇨고를 섬긴 중등 여방(中﨟女房)의 뱃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오미 고궁신사(胡宮神社) 문서(『불사리상승계도(仏舎利相承系図)』[9])는 기요모리 생모를 기온노 뇨고의 여동생으로 하고, 기온노 뇨고가 기요모리를 양자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기요모리가 다다모리의 정실(正室)의 자식이 아님에도 적남(嫡男)이 된 배경에는, 후견인인 기온노 뇨고의 권세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이지 4년(1129년) 정월, 12세에 종5위하(従五位下)·좌병위사(左兵衛佐)에 서임되었다.[41] 이에 대해 후지와라노 무네타다는 자신의 일기 《츄유키》(中右記)에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평가하며 경악했다.[11][12] 같은 해 3월에 이시즈미 하치만구 임시제의 무인(舞人)으로 뽑혔는데,[13] 기요모리의 말을 끌 마부를 기온노 뇨고의 양자였던 내대신 미나모토노 아리히토의 수행원이 맡았던 것에서, 어릴 적 기요모리는 기온노 뇨고의 비호 아래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요모리가 인(院)의 근신(近臣)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태정대신에 임명된 것은 당시 조정이 기요모리의 출생에 대한 소문을 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모토키 야스오(元木泰雄)).
젊은 시절의 기요모리는 도바 천황의 총신이자 아버지 다다모리의 계실인 이케노젠니의 종형제 후지와라노 이에나리의 저택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무렵 다카시나노 모토아키의 딸 사이에서 시게모리 · 모토모리가 태어났으나 아내와는 일찍 사별한 것으로 추측된다.
호엔 3년(1137년) 다다모리가 구마노(熊野) 본궁(本宮)을 조영(造營)한 공으로 인해 기요모리는 히고노카미(肥後守)에 임명되었다. 규안 3년(1147년)에는 후처 다이라노 도키코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 무네모리가 태어났다. 도키코의 아버지 다이라노 도키노부(平時信)는 도바 법황의 판관 대리(判官代, 호간다이)로써 후지와라노 아키요리, 신제이와 더불어 원청(院廳)의 실무를 담당했다.
같은 해 6월 15일, 기요모리는 기온샤(祇園社)로 무악을 봉납하러 갔으나 휘하의 노토들과 신인(神人)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다툼에서, 부하들이 쏜 화살이 보전(寶殿)에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기온 투란 사건(祇園闘亂事件)).[42] 엔랴쿠지는 다다모리, 기요모리의 유형(流刑)을 요구하며 강력하게 호소했으나 도바 법황은 엔랴쿠사의 공세로부터 다다모리 부자를 보호하면서 기요모리의 죄에 대한 처벌을 속동(贖銅) 30근이란 벌금형으로 그쳤다.
그 후 기요모리를 대신해 이케노젠니 소생의 손아랫동생 이에모리가 히타치노스케(常陸介), 고바노카미(右馬頭)로 임명되어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규안 5년(1149년) 이에모리가 급서하면서 기요모리의 적통(嫡統)으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이에모리의 동모제(同母弟)·다이라노 요리모리는 15세의 연령차가 있어 기요모리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기요모리도 형제간의 둘째로서 대했지만, 쓰네모리·노리모리에 비해 그 관계는 미묘한 것이었다.
그 후, 기요모리는 아키노카미(安藝守)에 임명되어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어 막대한 이익을 거둬, 아버지와 함께 서국(西國)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그 무렵부터 미야시마의 이쓰쿠시마 신사를 숭앙하게 되었다. 닌페이 3년(1153년)에는 다다모리 사후에 헤이시 일문의 동량이 되었다.
115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기요모리는 다이라씨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이전에는 미미한 직책만을 맡았던 정계에 야심 차게 진출했다. 1156년,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함께 호겐의 난에서 반란군을 진압하여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는 교토에서 최고의 무사 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맹을 맺었던 두 가문이 격렬한 라이벌 관계로 돌아서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4년 후인 1160년 헤이지의 난에서 절정에 달했다.[1][2]
2. 2.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호겐 원년(1156년)에 일어난 호겐의 난에서는 양어머니 이케노젠니(池禪尼)가 스토쿠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의 유모였기에 기요모리의 입장은 난처했다. 하지만 일문의 결속을 위해 고시라카와 천황 측에 가담해 승리를 거두고 하리마노카미(播磨守), 다자이노다이쇼니(大宰大貳)가 되었다.[1] 신제이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賴)는 니조 친정파의 대립에서 중립적인 입장에 있었으나, 헤이지 원년(1159년)의 헤이지의 난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후지와라노 쓰네무네(藤原經宗), 후지와라노 고레카타(藤原惟方) 등 반(反)신제이파를 일소하면서 급속히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시게나리, 미나모토노 스에자네, 미나모토노 미쓰야스 등의 유력 무사가 멸망했기 때문에 기요모리는 무사들 중 제1인자가 되어 조정의 군사력, 경찰력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기요모리는 무가정권 수립의 기초를 쌓게 되었다.115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기요모리는 다이라씨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이전에는 미미한 직책만을 맡았던 정계에 야심 차게 진출했다. 그러나 그 이전인 1156년, 그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미나모토씨의 당주)와 함께 호겐의 난에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로써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는 교토에서 최고의 무사 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맹을 맺었던 두 가문이 격렬한 라이벌 관계로 돌아서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4년 후인 1160년 헤이지의 난에서 절정에 달했다. 요시토모(그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와 함께 승리한 기요모리는 이제 천황의 수도 교토에서 가장 강력한 무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의 가문이 지방에서 얼마나 큰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요모리는 자비를 베풀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포함한 요시토모의 생존 자녀들을 유배 보냈다. 이러한 관용은 후에 다이라씨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2. 3. 전성기

아내 도키코가 니조 천황의 유모가 된 것을 계기로 기요모리는 천황의 유부(乳父)이자 후견인으로서 게비이시벳토(檢非違使別當)·주나곤(中納言)이 되는 한편 고시라카와 상황의 인쵸(院廳)의 벳토까지 겸하면서, 천황과 상황 양쪽을 섬기며 반석의 체제를 쌓게 되었다. 오호 원년(1161년) 9월 고시라카와 상황과 시게코(平滋子) 사이에 황자 노리히토(憲仁)가 태어나자 도키타다(平時忠), 노리모리(平敎盛)가 태자 책봉을 획책했다. 니죠 천황은 이러한 움직임에 격노해 도키타다와 노리모리, 나리치카(藤原成親), 노부타카(藤原信隆) 등을 해임하고 고시라카와 상황의 인세이를 정지시켰다. 기요모리는 천황의 황거(皇居)에 무사를 숙직시켜 경호하게 하면서 자신은 천황을 지지할 자세임을 명확히 보였다.[1]
이듬해 3월에는 헤이지의 난 때 유배되었던 니죠 천황 친정파 쓰네무네(藤原経宗)가 교토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고, 6월에는 도키타다나 스케카타가 니죠 천황을 가모 진쟈에서 저주한 죄로 유배되었지만, 기요모리는 니죠 천황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 친정(親政)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 또한 간바쿠(關白) 모토자네(近衞基實)에게 딸 모리코(盛子)를 시집 보내 셋칸케(攝關家)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인세이를 정지당한 고시라카와 상황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아, 조칸 2년(1164년)에 렌게오우인(蓮華王院)을 고시라카와 상황을 위해 지어주고, 렌게오우인에 장원(莊園)과 영지도 기부하여 상황의 경제 기반도 강화시켰다. 고시라카와 상황의 움직임에 경계심을 품고 있었던 니조 천황은 조칸 3년(1165년)에 시게모리를 산기(參議)에 임명하면서 헤이시에 대한 의존이 깊어졌으나 7월 28일 붕어했다.[1]
어린 로쿠조 천황의 섭정으로서 기요모리의 사위 모토자네가 섭정이 되어 정치를 주도하고, 기요모리는 다이나곤(大納言)으로 승진해 모토자네를 보좌하는 형식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9월에는 처남 도키타다가 귀경이 허락되고, 12월 25일에는 조카인 노리히토가 친왕선하를 받자 기요모리는 칙벳토(勅別當)가 되었다. 이 무렵 고시라카와 인세이파가 서서히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의 행동이나 성격에 불안을 느껴 인세이 부활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만(永滿) 2년(1166년) 7월 26일, 셋쇼이자 후지와라 집안의 씨장자였던 모토자네가 급사하면서 고시라카와 인세이는 부활하고 모토자네의 아들인 모토미치(近衛基通)가 어리다는 이유로 모토후사(基房)가 섭정이 되었다.[1]
모토자네의 영지였던 셋칸케령이 모토후사에게 옮겨진다면 헤이시에게는 대타격이었다. 그러나 기요모리는 구니쓰나(藤原邦綱)의 조언에 따라 덴카와타리령(殿下渡領), 칸가쿠인령(勸學院領), 미도류사원령(御堂流寺院領)을 제외한 후지와라 집안 소유의 사적인 영지들을 모토자네의 미망인인 모리코가 상속받게 하는 것으로 셋칸케령의 관할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10월 10일에는 노리히토 친왕의 태자 책봉으로 기요모리는 춘궁대부(春宮大夫)가 되었고, 11월에는 나이다이진(內大臣)이 되었다. 다음해 닌난(仁安) 2년(1167년) 2월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다. 무사로서 태정대신이라는 지위에 오른 것은 기요모리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태정대신은 시라카와 천황의 치세에 모로자네(藤原師實)와 셋칸(섭정과 칸바쿠)을 다투다 패한 노부나가(藤原信長)가 취임하면서 실권 없는 명예직으로 전락해 있었고, 석 달 뒤 기요모리는 태정대신을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대신 그의 적자인 시게모리가 닌난 2년 5월에 내려진 선지(宣旨)에 의해 도카이·도산·산요·난카이 등 4개 도(道)의 치안경찰권을 위임받아, 시게모리 자신이 가진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내외에 분명히 드러냈다.[1]

닌난 3년(1168년) 기요모리는 병으로 쓰러져 출가했다. 원인은 스뱌쿠(寸白, 기생충으로 인해 생긴 병)라고 하였다. 기요모리의 병이 정국 불안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한 고시라카와 상황은 당초 예정을 앞당겨 로쿠조 천황을 노리히토 친왕에게 양위시키는 것으로 체제의 안정을 기도했다. 병이 낫자 기요모리는 후쿠하라(福原)에서 별장 유키미노고쇼(雪見御所)를 짓고 예전부터 염원하던 이쓰쿠시마 신사의 정비와 일·송 무역의 확대에 몰두했다. 가오 원년(1169년) 고시라카와 상황은 출가해 법황이 되고,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법황과 더불어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수계(受戒)를 받았다. 이는 도바 법황과 다다자네(藤原忠實)가 같은 날 수계를 받은 예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 무렵 고시라카와 법황이 후쿠하라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과 면회하기도 하고, 기요모리의 딸 도쿠코가 다카쿠라 천황에게 출가하였으며, 후쿠하라에서 고시라카와 법황과 기요모리가 천승공양을 베풀면서 양자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했다. 또한 헤이시 일족의 융성도 극에 달하여 일족이 주요관직을 독점하고, 전국에 500여 개의 장원(莊園)을 보유한 것은 물론 송나라와의 교역으로 막대한 재화를 손에 쥐어, '''"헤이시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1]
115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기요모리는 다이라씨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이전에는 미미한 직책만을 맡았던 정계에 야심 차게 진출했다. 1156년, 그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미나모토씨의 당주)와 함께 호겐의 난에서 반란군을 진압하여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는 교토에서 최고의 무사 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맹을 맺었던 두 가문이 격렬한 라이벌 관계로 돌아서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4년 후인 1160년 헤이지의 난에서 절정에 달했다. 요시토모(그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와 함께 승리한 기요모리는 이제 천황의 수도 교토에서 가장 강력한 무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의 가문이 지방에서 얼마나 큰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요모리는 자비를 베풀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를 포함한 요시토모의 생존 자녀들을 유배 보냈다. 이러한 관용은 후에 다이라씨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한다.[1][2]
궁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무사 가문의 수장이라는 지위 덕분에 기요모리는 상황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과 그의 아들 니조 천황(二条天皇) 사이의 궁중 다툼을 이용할 수 있는 독점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조작을 통해 기요모리는 정계에서 승진을 거듭했지만, 그의 승진 대부분과 그의 가문이 궁중에서 지위와 칭호를 얻는 데 있어서 성공은 고시라카와의 후원 덕분이었다. 1167년 기요모리가 무사 가문 출신으로는 최초로 정부의 최고 장관인 ''다이조다이진''에 임명되고, 사실상 천황 정부의 수장이 되었을 때 절정에 달했다. 관례대로 그는 곧 그 직책과 다이라씨의 지도자 자리를 사임했는데, 이는 최고의 지위를 얻음으로써 사회적·정치적 명성을 유지하면서도 그에 따른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목표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대 일본 정부의 최고위급에서 수년간 흔히 행해지던 관행이었고, 기요모리는 이를 통해 교토 정부 내에서 자신의 강력한 지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문벌 귀족 가문 출신의 많은 궁중 귀족들은 기요모리의 권력 장악과 다른 고위 궁중 귀족들에 대한 그의 처신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1]
2. 4. 헤이케에 대한 불만
지쇼 원년(1177년) 6월,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의 밀고로 발각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기요모리는 인의 근신세력을 배제하고자 했다. 사이코는 처형되었고, 후지와라노 나리치카는 맏아들 시게모리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목숨만 건져 비젠으로 유배되었으나, 제대로 된 음식조차 공급받지 못한 채 7월 9일 암살되었다. 슌칸 승도는 기카이가시마로 유배되었다. 다만 기요모리는 법황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았다. 일설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서 엔랴쿠지 공격을 명받았던 기요모리가 엔랴쿠지와의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일으킨 자작극이라는 견해도 있다.[1]지쇼 3년(1179년)은 기요모리에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6월에 딸 모리코가 사망하자 법황은 모리코 소유의 장원을 몰수하였다. 7월에는 맏아들 시게모리마저 42세로 병사하였다. 법황은 시게모리의 지행국이었던 에치젠을 몰수하고, 스무 살의 모토미치(그의 아내는 기요모리의 딸이었다)를 제쳐두고, 8살의 모로이에를 곤노주나곤에 임명했다. 이 인사는 셋칸케 적류의 지위를 고노에 집안이 아닌 마쓰도노 집안이 잇게 할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었다. [1]
기요모리는 법황의 정책에 격노하여 11월 14일 후쿠하라에서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올라와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것이 바로 '''지쇼 3년의 정변'''이다. 기요모리는 간파쿠였던 모토후사·곤노주나곤 모로이에 부자를 비롯해 후지와라노 모로나가 등 반(反) 헤이케 성향을 지닌 구게와 인의 근신 39명(귀족 8명, 덴조비토, 수령, 게비이시 등 31명)을 모두 해임시키고 친(親) 헤이시측 구게를 임관시켰다. 법황은 기요모리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기요모리는 이를 용서하지 않고, 11월 20일에는 법황을 도바덴에 유폐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고시라카와 인세이는 완전히 정지되었다. [1]
고시라카와 법황의 도발에서 비롯된 쿠데타의 사후 정권 구상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던 탓에, 다카쿠라 천황이나 모토미치, 무네모리 등 정치적인 경험이 미숙한 이들을 대신해 후쿠하라로 돌아갔던 기요모리는 다시 정권 표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기요모리는 해임되었던 이복동생 요리모리, 가네마사의 처분을 해제하는 등 일문의 결속에 힘쓰는 한편, 모토미치의 보좌를 위해 후지와라 집안의 유력자 사다이진 쓰네무네, 우다이진 가네자네의 회유를 꾀했다. 실제 정무에서는 도키타다나 다카스에, 미치치카 등의 유능한 관리가 기요모리의 대변자가 되었다. 지쇼 4년(1180년) 2월 다카쿠라 천황이 양위하고, 기요모리의 딸 도쿠코 소생의 황태자 노리히토 친왕이 즉위하였다(안토쿠 천황). 명목상 다카쿠라 상황의 인세이였지만 헤이케의 괴뢰정권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더욱이 법황을 유폐시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많은 반(反) 헤이케 세력에게 거병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1]
2. 5. 반란의 불꽃
모치히토 왕은 겐슌몬인의 압력으로 친왕 선하도 받지 못했고, 하치죠인의 양자로서 즉위할 기회도 있었지만 지쇼 3년에 일으킨 정변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모치히토 왕에게는 하치죠인 직속의 무력이라 할 수 있는 미나모토노 요리마사나 미나모토노 나카이에 등이 따르고 있었고, 헤이케에 대한 반발이 강했던 고후쿠지나 온죠지도 이 움직임에 동조했다. 그러나 계획은 미연에 발각되어, 기요모리의 재빠른 대책으로 게비이시가 3백 기(騎)의 병사로 추격해 모치히토 왕과 요리마사 등을 토벌했다. 그러나 지샤 세력 특히 온죠지는 물론, 친헤이케파였던 엔랴쿠지에서도 반헤이케 움직임이 나왔다.[1]그 사이에 헤이케 추토를 명했던 모치히토 왕의 영지(令旨)가 전국(특히 도고쿠)의 겐지들에게 퍼져 8월에는 이즈 국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이에서는 다케다 노부요시를 도료로 하는 가이 겐지 집안, 9월에는 시나노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거병했다. 이에 기요모리는 이들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다이라노 고레모리를 총대장으로 한 대군을 간토로 파견했으나 이들은 후지 강에서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치러보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이 패전을 계기로 지샤 세력 특히 모치히토 왕의 반란에 협조적이었던 온죠지나 고후쿠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오미 겐지 집안이 봉기해 온죠지, 엔랴쿠지의 반헤이케 세력과도 제휴해 물류의 요충 비와호를 점거하고, 반란 세력은 교토를 공격할 정도의 세력으로까지 성장했다. 또한 규슈에서도 반란이 발발했다.[1]
12월에 이르러 기요모리는 도모모리 등이 이끄는 군세를 파견해 온죠지를 불살라 버리고, 오미 겐지의 야마모토 요시쓰네를 격파하고 오미 평정에 성공했다. 다음으로 기요모리는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의하고, 시게히라를 총대장으로 하는 대군을 난토(南都)에 파견했다. 그리고 12월 28일, 고후쿠지나 도다이지 등 난토의 여러 사찰들은 시게히라의 화공(火攻)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다. 이로 하여 교토 주변의 반헤이케 움직임은 진정되었지만, 난토에서의 사찰 방화는 기요모리에게 그가 두려워하던 불적(佛敵)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말았다.[1]
3. 최후
지쇼 4년(1180년) 말, 헤이케의 전통적인 세력 기반인 서국에서도 이요의 고노 미치키요(河野通淸)·미치노부(通信) 부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5년에는 분고의 오가타 코레요시(緒方惟栄), 우스키 코레타카(臼杵惟隆), 사가 코레노리(佐賀惟憲) 등의 호족이 병사를 모았고, 이세시마(伊勢志摩)에서도 반란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도고쿠에서도 헤이케 지지파였던 사타케 씨(佐竹氏) 등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토벌당하는 등 반란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1]
이 와중에 기요모리는 교토를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기나이인 오미 국의 물관직(惣官職)을 설치하고 무네모리를 임명했다. 앞서 나라 시대인 덴표 3년(731년)에 수도와 기나이를 대상으로 해당 지역의 병마권을 부여받았던 니이타베 친왕(新田部親王)의 예를 모방하여 오미 국에 병사역과 병량미를 부과해 임전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단바에 여러 장원 총하사직(總下司職)을 설치하고 그 자리에 다이라노 모리토시(平盛俊)를 임명하는 한편, 에치고의 죠 스케나가(城資永), 무쓰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 등에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다케다 노부요시 토벌을 명하는 선지를 내리게 했다.[1]
1181년 2월 26일에는 진제이(鎭西)로 낙향하자는 시게히라의 제의도 물리치고 무네모리 이하 일족의 무사가 토고쿠 추토(追討)에 나서기로 결정했지만, 바로 다음날인 27일에 기요모리는 열병으로 쓰러졌다. 죽음을 깨달은 기요모리는 자신의 사후 일은 모두 무네모리에게 맡기고, 무네모리와 협력해 정무를 진행하도록 법황에게 아뢰었지만 답변이 없었다. 한을 품은 기요모리는 "천하의 일은 무네모리에게 맡기고, 다른 의견은 없도록 하라"란 말을 남기고, 윤 2월 4일에 구죠가와라구치(九條河原口)의 다이라노 모리쿠니(平盛國)의 저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64세였다.[1]
그의 병에 대해 전하는 기록들을 볼 때, 당시 대륙에서 전래되어 유행되었던 풍토병 즉 말라리아에 걸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 기요모리의 죽음으로 헤이시의 신체제 구축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1]
《헤이케 이야기》는 기요모리가 죽음에 이르러 "내 죽은 뒤에는 당탑도 효양도 필요 없다! 내 무덤 앞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을 베어 가져오너라! 그것이 나에 대한 효도이며 나를 위한 공양이라 여겨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하지만, 이러한 유언은 일본에서도 센고쿠 시대 무사 정도가 되어서야 나올 수 있는 발상으로 기요모리가 그런 유언을 실제로 남겼는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교쿠요》에는 기요모리가 서거한 해 8월 1일, 요리토모가 비밀리에 인(院)에 헤이케와의 화의를 요청했을 때, 무네모리는 기요모리의 유언으로써 "나의 아들, 손자로서 단 한 명이 살아남는다 해도 그 시신은 요리토모의 앞에서 내보여야 한다!"라며 이를 거부했는데, 그만큼 기요모리가 요리토모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1]
기요모리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에는 지쇼 5년 2월 27일 "선문(기요모리)이 두풍을 앓는다고 한다", 윤 2월 3일 "선문의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윤 2월 4일 "밤에 들어 전해 듣건대, 선문이 훙거하였다"라고 적혀 있으며, 윤 2월 1일에는 이미 중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1]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 『메이게쓰키』에는 "지난 밤 술시(오후 8시), 입도 전 태정대신이 이미 훙거하였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전해졌다. 혹은 임종 시에 동열민절(動熱悶絶)하였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으며,[21] "동열민절"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햐쿠렌쇼』에서는 "일전에 병을 앓아 몸이 불처럼 뜨거웠다"라고 적혀 있으며, 도다이지와 고후쿠지를 불태운 벌이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헤이케 이야기』 엔쿄본에서는 "병에 걸린 날부터 물조차 목에 넣지 못하고, 몸이 불타는 듯 뜨거웠다. 누워 있는 2, 3간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그 뜨거움을 견디기 어려워 가까이 있는 자가 드물었다. 말하는 것이라고는 '앗뜨거, 앗뜨거' 뿐이었다. (병에 걸린 날부터 물도 마시지 못하고 몸이 불처럼 뜨거워졌다. 병실에 들어온 자는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가까이 있는 자도 적었다. 기요모리는 '뜨거워, 뜨거워'라고만 말했다.)"라고 하며, "민절벽지(悶絶躃地)하여 7일 만에 결국 앗치시니(あっち死に)하고 말았다"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부터, 에도 시대의 『하이후 야나기타루』 초편에서 "기요모리의 의사는 알몸으로 맥을 짚었다"라고 야유받은 것처럼, 기요모리의 사인은 열병이었다고 생각되어 왔다.
현대의 소설가인 요시카와 에이지의 『신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잠복학(간헐열, 말라리아)"이라고 하였으며, 모리무라 세이이치도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병태병리학·미생물학자인 하야카와 사토루도 말라리아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있다.[21] 말라리아는 열대병이지만, 과거에는 온대에도 널리 분포하여 일본에서도 8세기 초의 다이호 율령에서 "학"으로, 10세기의 『와묘루이주쇼』에 "의야미", "와라와야미"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21] 하야카와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사인도 말라리아라고 하고 있다.[21]
가이온지 조고로와 요시야 노부코는 "두풍"에 주목하여 뇌출혈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의학사 연구가인 핫토리 도시요시는 감기가 원인인 폐렴이라고 하는 한편, 뇌신경외과 의사인 와카바야시 도시미쓰는 감기에서 수막염을 일으켰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의사·작가인 시노다 미쓰아키는 용혈성 연쇄상구균 감염증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중세사가인 모토키 야스오는 기요모리와 친했던 후지와라노 구니쓰나가 같은 시기에 발병하여 죽은 것으로 보아, 어떤 감염증이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4. 사후와 평가
기요모리는 전통적으로 '역신(逆臣)'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온후하고 정이 깊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주킨쇼》(十訓抄)에는 젊은 시절 기요모리가 무례한 행동에도 농담으로 넘기고, 추운 겨울에는 어린 종자를 자신의 옷자락으로 덮어 재우며, 최하층 소사에게도 인간적으로 대우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도 곤경에 빠진 지인을 돕는 등 의리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덴카승합사건에서 기요모리가 마쓰도노 모토후사에게 보복했다는 《헤이케 이야기》의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는 기요모리가 아닌 장남 시게모리가 보복했고, 기요모리는 오히려 모토후사에게 사죄했다고 한다. 이는 헤이케와 셋켄가의 갈등이 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칸쇼(愚管抄)에서는 헤이지의 난 전후의 기요모리에 대해 "몹시 신중했고, 시의적절하게 대처했으며, 모두에게 사려 깊게 대했다"고 묘사하며, 복잡한 인세이기의 정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 인(院), 셋칸케, 지샤(寺社) 세력과 대립하면서 강경하고 과격한 대처를 한 것은 그의 평판을 깎아내렸다.
《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에는 승려의 기도로 비가 내린 것을 우연이라 일축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오와다노토마리 항구의 풍랑을 막기 위해 인공섬 교가시마(經が島)를 지을 때 인신공양을 폐지했다는 전설이 있는 등 미신을 믿지 않는 개명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송과의 무역을 통한 재정 기반 개척, 교가시마 축조와 같은 공공사업 추진 등, 귀족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우수한 정치가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군사적으로도 헤이지의 난에서 여러 부대와 제휴한 전술로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군을 격파하고, 대궐 및 시가지 피해를 최소화하는 등 세련된 전술을 가진 우수한 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교토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불교 세력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고후쿠지와 온죠지에 총공격을 가한 것은 당시에는 평판이 나빴지만, 무력을 가진 종교 세력이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저지한 의의는 무시할 수 없다. 이 정책은 훗날 가마쿠라 막부가 선종 및 염불종(念仏宗)을 보호하는 형태로 이어지게 된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기요모리가 죽을 때 열병이 너무 심해서 누구든 가까이 가면 열기에 휩싸였다고 묘사되어 있다.[3]
우타가와 쿠니요시의 작품에는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여우 여신 기코 텐노(貴狐天王, 다키니텐)를 만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5. 묘소
다음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묘소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6.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소재로 한 현대의 창작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가마쿠라 시대 서사시인 『헤이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4]
다이에이 영화 제작,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1955년 영화 『신 헤이케 이야기』는 14세기 서사시 『헤이케 이야기』를 1950년에 요시카와 에이지가 다시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4] 이 영화는 기요모리의 젊은 시절을 다루며, 그를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기요모리는 "신하들과 승려들은 저를 신성 모독으로 고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지지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영주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더 큰 싸움이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굴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짓밟혀도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4]
19세기 목판화가들은 기요모리를 죄와 응보의 전형으로 묘사했다.[4]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기요모리의 환영」은 기요모리 역을 맡은 배우 나카무라 우타에몬 4세가 눈 덮인 정원에서 학살당한 적들의 뼈와 해골로 변한 끔찍한 환영을 마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4]
비디오 게임에서 기요모리는 전국 무쌍 시리즈와 『진삼국무쌍 스트라이크포스』, 『하루카나루 토키노나카데 3』 등에 등장한다.
데즈카 오사무의 피닉스 시리즈 제9권 「격동의 시대」에서는 기요모리가 동정적인 악당으로 등장한다.
전설의 땅 어드벤처 게임북 시리즈의 6권 "떠오르는 태양의 영주들"에는 기요모리 경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2012년 NHK 대하드라마는 그를 소재로 했다.[5]
메이지 시대 이후에 지어진 작품은 다음과 같다.
분야 | 작품명 | 작가/감독/주연 등 |
---|---|---|
회화 | 『방년무사무류 평상국청성』(1883년) | 월각방년 |
회화 | 『평청성염소병지도』(1883년) | 월각방년 |
소설 | 『신・헤이케이 모노가타리』 | 요시카와 에이지 |
소설 | 『헤이케이 모노가타리』 | 모리무라 세이이치 |
소설 | 『청성』 | 미타 마사히로 |
소설 | 『미야오본 헤이케이 모노가타리』 | 미야오 도미코 (NHK 대하드라마 『요시쓰네』 원작 중 하나) |
소설 | 『헤이케』 | 이케가미 쇼이치로 |
소설 | 『해국기』 | 하토리 마스미 |
소설 | 『소설 평 청성』 | 다카하시 나오키 |
영화 | 『신・헤이케이 모노가타리』(1955년) | 감독: 미즈구치 켄지, 주연: 이치카와 라이조 |
텔레비전 드라마 | 『신・헤이케이 모노가타리』(1972년, NHK 대하드라마) | 주연: 나카다이 다쓰야 |
텔레비전 드라마 | 『평 청성』(1992년, TBS) | 주연: 마쓰다이라 켄 |
텔레비전 드라마 | 『평 청성』(2012년, NHK 대하드라마) | 주연: 마쓰야마 켄이치 |
인형극 | 『인형 역사 스펙터클 헤이케이 모노가타리』(1993년 12월 - 1995년 1월, NHK 인형극) | 주연(목소리): 가자마 도후 |
만화 | 『불새 난세편』 | 데즈카 오사무 |
애니메이션 | 『헤이케이 모노가타리』(2022년, 후지테레비) | 목소리: 겐다 테츠쇼 |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3]
서적
The Tales of the Heike
Columbia University Press
[4]
DVD
Le héros sacrilège
Films sans Frontières
[5]
뉴스
大河ドラマ「平清盛」:語り部は敵方・源頼朝 イケメンをキャスティング予定
http://mantan-web.jp[...]
毎日新聞デジタル
2011-05-12
[6]
간행물
九条道家の日記『玉蘂』建暦元年3月14日条に「正月十八日」と誕生日が書かれている。
[7]
웹사이트
平清盛 京都ゆかりの地をたどる {{!}} 京都観光情報 KYOTOdesign
https://kyoto-design[...]
2024-02-09
[8]
논문
2020-05-18
[9]
이미지
仏舎利相承図テクスト
http://www.nihonnoto[...]
[10]
논문
2020-05-18
[11]
간행물
「人耳目を驚かすか、言ふに足らず」『中右記』大治4年正月24日条。
[12]
간행물
通常、武士の任官は三等官の尉から始まり、二等官の佐に任じられるのは極めて異例であった。
[13]
간행물
『中右記』3月16日条。
[14]
간행물
これにより後世において「平大相国(へいだいしょうこく)」と尊称される。
[15]
간행물
7月9日に食物を与えられず殺害される。
[16]
이미지
平清盛炎焼病之図
https://dl.ndl.go.jp[...]
[17]
웹사이트
月岡芳年の三枚続絵『平清盛炎焼病之図』
https://www.benricho[...]
2020-05-18
[18]
웹사이트
『平清盛炎焼病之図』 月岡芳年
http://artmatome.com[...]
2020-05-18
[19]
간행물
司命(しみょう)と司録(しろく)は、閻魔庁(えんまのちょう)の書記官。閻魔卒(えんまそつ)は、閻魔に仕えて罪人を責める獄卒。つまりは、閻魔付きの鬼。
[20]
간행물
『玉葉』による。
[21]
웹사이트
平清盛の死因はマラリアだった? “謎の高熱”を現代の医師が診断〈dot.〉
https://dot.asahi.co[...]
201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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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安元白山事件をめぐる「史実」と「物語」の間 <論説>
広島大学大学院教育学研究科下向井研究室
[23]
웹사이트
文化財
http://nofukuji.jp/b[...]
能福寺
2020-05-18
[24]
간행물
能福寺 平相國廟
[25]
웹사이트
清盛塚石造十三重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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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戸市
2020-05-18
[26]
웹사이트
平清盛と神戸 平清盛のお墓
https://www.city.kob[...]
神戸市
2020-05-18
[27]
간행물
切戸町 清盛塚
[28]
간행물
六波羅蜜寺 平清盛公之塚
[29]
간행물
嵯峨鳥居本小坂町 祇王寺
[30]
웹사이트
彦島・清盛塚
https://tabi-mag.jp/[...]
一般社団法人プレスマンユニオン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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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清盛塚<山口県下関市>
https://genpei.sakur[...]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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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彦島 清盛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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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西八条第跡
[34]
간행물
若一神社
[35]
웹사이트
六波羅蜜寺の仏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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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国立博物館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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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重要文化財一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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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波羅蜜寺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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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第3回 歴史を今に伝える、六波羅蜜寺の宝物たち - 京都宝物館探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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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文化推進委員会、株式会社エクザム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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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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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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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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